[카테고리:] inkless di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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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월 이일
주인집 할매의 아들이 가스레인지를 고쳐주러 온다고 하여 일곱시 반에 기상했다. 아들은 검정색 피케이 티셔츠를 린넨인지 마인지 모를 가벼운 소재의 베이지 색 바지춤에 집어넣은 단정한 모양새로 왔다. 방송국에서 기술사를 하고 있다는 이답게 그가 손을 대자 가스레인지는 바로 스파크를 튀겼다. 임시직으로 노조위원장을 맡은 지 3개월 되었다는 아들에게 요즘엔 별일 없냐고 물으니 태평성대란다. 이 집에 이사온 지 일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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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기사님은
옛날옛적 유통 업무 맡았을 때 알게 된 아저씨다. 파주에서 만들어진 책을 부산 사무실까지 날라다 주는 물류 업체 이름이 날개였고 날개 기사님은 우리 지역을 관할해 책을 내리고 올려주시는 담당 기사님으로, 함자 조차 알지 못한 채 영원히 날개 기사님으로 저장되어 있다. 퇴사 이후 단 한 번도 연락한 적 없지만 가끔 날개 기사님이 프로필 사진을 바꿀 때마다 클릭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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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은 느낌 투성이
오랜만에 집에 일찍 들어왔다. 아빠가 틀어둔 유튜브에선 이재명이 시종일관 호통을 치고 있어서 후덥지근한데도 방문을 꾹 닫게 된다. 이재명을 싫어하는 사람도 이재명을 좋아하는 사람도 모두 이재명이 소락배기 지르는 영상을 보며 산다… 나또한 이재명과 김혜경이 나오는 동상이몽을 보며 살고 있다 … . 너무 많은 느낌들이 왔다 가는 시절이다. 지난 주말에는 철원에 갔다. 서서 음악 듣다 자주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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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한가운데
엊그제 초저녁 백델 책을 읽다가 살풋 잠이 들었는데, 완전히 정신이 감기기 전에 아빠가 집에 들어온 걸 봤다. 너무 졸려서 방문을 잠그지 않고 잤더니 바로 아빠에 대한 악몽을 꿨다. 아빠의 막냇동생인 국표삼촌(국민투표날에 태어나서 국표임)과 어떤 카페 같은 곳에 앉아 서로 악다구니를 써대며 니가 더 최현성(애비의 실명)이랑 닮았다고, 너는 완전히 느그형/느그아빠를 쏙 빼닮았다고 싸워대는 꿈이었다. 내가 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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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시작
장 서는 날이라 유성시장에서 토마토 한소쿠리(오천원)와 햇감자(사천원)를 좀 샀다. 한국에 오자마자 잊어버린 감각―지나가는 낯선 이에게 반사적으로 미소짓기를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시장에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마주치기를 어려워하지 않는다. 바닥에 널린 마늘과 조갯살, 족발, 가지, 꽃화분 들을 구경하다가 엄마랑 늘 가던 가게에 가서 보리밥이랑 잔치국수, 항아리 막걸리를 마셨다. 밥 먹고 핫바 하나씩 사서 벤치에 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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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 5일 차
1일차만에 애비게일과 갈등 재발. 대전통닭에서 닭 먹다 처울고 늘 그렇듯 엄마에게 화풀이. 늘 하던대로 엄마 슴가에 대못 박고 당근 부동산 순회. 그러나 이번엔 엄마가 아빠에게 추방령을 내리겠다고 하여 다시 헤헤거리며 엄마 옆구리에 붙음. 아 난 진짜 우리 엄마가 너무 웃기고 귀엽다…. 갈수록 더 엄마가 좋다. 왜냐면 내가 계속 변화하듯 우리 엄마도 인간적인 진화를 거듭하고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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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니파트 헌 옷 표백 공장
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세살배기 딸 하마라는 공업 용수가 흐르는 공터 텃밭에서 당근을 캐먹고 표백 작업 중인 헌 옷 무덤위를 굴러다니며 논다. 파니파트시 남부 심라구지 마을은 주민의 10%가 피부질환 등 중증 질환에 시달리고 있다. 천 년 전만 해도 사람이 가진 옷가지의 수는 열 손가락을 채 넘기 힘들었을텐데(누에나 삼베에서 섬유를 얻고, 그것을 꼬거나 베틀로 짜 직물로 만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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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I read in 2024
: 재작년 12월 31일에 성아랑 대흥동에서 파스타 한 접시 먹고 알라딘 중고서점 구경 갔다가 구매했던 책. 새해 첫 책으로 읽었던 기억. 책과 읽고 쓰는 행위가 아주 중요한, 어떤 공룡들의 세계에 대한 재기 넘치는 이야기였는데… 초딩 때였으면 재밌게 읽었을지도 모르나(약간 ‘아더와 미니모이’ 감성) 스물 여덟아홉 먹은 처녀의 동심엔 이미 옹벽이 쳐질 대로 쳐져서 재미를 느끼기 힘들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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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건의 굴레
내가 물놀이를 할 때마다 들고 다니는 긴 수건은 송월타월에서 만들어진 것이고, 언제부터 우리집에 있었던 건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된 물건이다. 그래도 아직 물기를 닦는 역할을 훌륭히 수행할 수 있고 스누피가 그려진 디자인도 마음에 들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이 수건에 쌓인 세월이 애착을 형성했기 때문에(십년 전 물건보다 어제 산 물건을 버리는 게 훨씬 쉽다),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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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련은 왜…
옛 소련 애니메이션은 왜이리 서늘하고 아름다운지 추운 지방에서 만들어서 그런 건지 체홉이 쓴 소설 중에 <애수>라는 제목을 단 게 있었지 애수라는 정서의 원조는 러시아인 것마냥 애수의 홈타운이 시베리아인 것마냥 아름답고 춥고 외로운 것을 보면 소비에트 공화국이 생각이 나네